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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항 근처에 위치한 섬이며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논란이 되었다. 종전 직후까지 약 6년을 군함도에서 강제노역으로 보낸 구연철 선생은(85) 71년 만에 하시마 섬을 찾아 당시의 생활상을 증언했다. 하시마 탄광은 1890년 미쓰비시 재벌의 소유가 되었고 석탄 채굴이 본격화했다. 석탄량의 증가와 함께 섬에는 구연철 선생과 같은 노동자가 늘었고 철근 콘크리트 고층 아파트 등이 차례로 만들어졌다. 한편 전시 중에는 노동력 부족을 보충해야 하기 때문에 강제 연행된 중국인이나 징용된 한반도 노동자도 가혹한 노동 환경에서 일했다. 사고나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구연철 선생은 1936년 징용 모집에 응하고 부산 근교의 농촌에서 하시마 섬으로 건너가면서 탄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마을에서는 가난한 농가였다. 당시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한국은 일본에서 작물을 약탈하고 있던터라 생존을 위해 하시마 섬 노역 모집이 생존 그 자체였다고 한다. 구연철 선생도 1939년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하시마 섬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토록 그리던 생활과는 전혀 다르다고 회상한다. 배급되는 콩은 썩어 있고 끓여서 먹었지만 설사를 자주 했다. 섬에는 남한 출신의 젊은이들도 있었다. 구자철 선생은 설사를 하면서 나무 막대 같은 것으로 맞으면서 노역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마늘 냄새, 조선인은 꺼지라고 한 적도 있었다. 원폭 투하 직후에는 지인 집으로 향하는 도중이 검게 탄 시체가 뒹굴거리는 광경도 보였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나가사키에서 본 참상. 구연철 선생은 전쟁은 안 된다고 한다.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을 때 일본 측 대사는 "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징용 정책을 실시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조치를 강구했다 "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인 해명은 없다. 구연철 선생은 호소한다."세계 유산이라면 평화와 인간 존엄의 소중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중국도 이번 군함도 영화에 대해 항일 대작이라고 극찬하며 보도했다고 한다. 한국의 유명 배우들이 출연해 개봉 첫날만에 97만여 명을 동원하며 역대 최고의 흥행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후 독일과 일본의 태도를 비교하는 등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없음을 보도했다. 한국의 사드배치를 놓고 중국과 갈등관계를 계속해오고 있는 지금 군함도 반응은 예외적인것 같다. 일본의 침략과 전범죄에 관해서는 중국의 입장은 확고하다. 양국사이에서 현명한 외교정책이 필요함을 군함도를 통해 보여지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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