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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15일 종전 72주년 기념으로 삿포로시 등에서 반전 평화를 호소하는 다양한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 각종 행사와 더불어 헌법 제9조를 비롯한 헌법 개정 항의 등 평화 운동 포럼 강연도 계획되어 있다. 19일 오후 6시부터는 전 교토 대학 교수의 사에 키케이시 강사가 "대미 종속의 전후를 생각-헌법과 역사관-" 이라는 주제로 전후 일본의 분석과 일본이 나아갈 길을 강연한다. 일본정부가 8.15 전몰자 추도식을 주도하게 된 것은 1963년부터다. 중일전쟁 이후 전몰자 310만명을 애도하고 종전을 다짐하는 국가적인 행사이지만 행사장은 단 하루만에 설치하고 철거한다. 전몰자 중 50만명은 일본국내에서 공습과 원폭으로 숨진 일반인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전쟁희생자를 추모하는 항구적인 시설이 일본에는 없다고 한다. 왜 그럴까. 2008년 2월 마코토 중원의원은 공습희생자를 위한 국립위령비 건립을 위한 질문주의서(質問主意書 내각에 대한 국회의원의 서면 질문)를 제출하였다. 당시 후쿠다 내각은 효고현 히메지시에 있는 태평양전 위령탑 평화 기원식에 정부 대표가 참석하고 있다는 이유로 추가 건립 이유는 없다고 응답했다. 히메지 위령탑은 공습 재해지자체가 공동으로 1956년에 건립되었다. 군인에 비해 무고한 시민에 국가적으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항의이기도 했다. 2003년부터 히메지에는 매년 총무성 정무관들이 참석하고 있다. 도쿄대공습(1945년 3월)으로 10만명이 숨진 시내에는 아직도 크고 작은 위령 시설들이 많이 있다. 이처럼 일본내 일반인 희생자에 대한 위령 추모는 지자체나 지역주민들의 자발로 이루어 지고 있으며 일본정부 차원의 지원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배경에는 전몰자 의미에 관한 이해의 대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으로 보느냐 국가의 잘못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보느냐의 차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자를 대표하는 것은 야스쿠니 신사이다. 물론 남편과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시켜 주는 것이 야스쿠니 신사임은 이해가 되나 그것은 필연적으로 국가에 공적이 있었는지의 선별 과정이 따른다. 전후 한때 야스쿠니 신사가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비춰지기도 했지만 1978년 A급 전범을 합사한 이후 국내외 비판이 커지면서 중심적인 추모 시설이 되는 길을 스스로 멀리한 듯 보인다. 전쟁수인론이라 불리는 생각 방식도 추모시설 논의에 물을 부었다. 전쟁이라는 면목으로 따르는 희생은 국민이 동일하게 부담해야 한다며 공습 피해에 대해서는 국가가 책임이 없다는 논리이다. 아시아에서 보면 일본은 전쟁 가해자이다. 같은 패전국 독일은 통일 후 1993년 중앙 추모 시설을 설치해 국내외의 모든 전쟁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추모식 개회사에서 아시아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1993년 호소카와 모리 히로 총리이다. 이후 아시아에 대한 가해 책임에 관한 언급이 지속적으로 있어 왔지만 아베 신조 총리는 2013년부터 일절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국가는 국민의 공동체로서 존재한다. 국가의 의사는 바뀌어도 국민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없다. 그러한 국가가 추진한 전쟁희생자 추모를 놓고 전후 일본은 아직까지 흐름을 정리하지 못하고 오늘까지 왔다. 국가적 항구 시설이 없는 상황에서는 일본정부와 국제적 이해관계를 넘어 일본국민과의 갈등과 골은 메워지지 않는다. 일본정부는 역사적 경위와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1972년부터 지속되는 평화가 모든 전쟁 희생자를 주춧돌로 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입장과 사정에 상관 없이 동일하게 추모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것이 국가적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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